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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 물음표

● 수치심 관련

by 메멘토타로 2023.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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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척이 말합니다

왜 이렇게 살쪘냐 결혼 언제하냐

 

내 편인 줄 알았던 남편이 말합니다

너가 뭘 한다고 나서고 그래

 

육아 얘기를 하던 중 친구가 말하죠

아이 엄마가 되서 그것도 모르니?

 

 

모두 수치심으로 당신의 행동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는 굉장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효과도 없을뿐더러

상대를 우울증 자기 혐오 중독 섭식 장애 수많은 문제에 빠져 들게 만들죠

책 수치심 권하는 사회는 분명히 말합니다

수치심으로 는 사람을 바꿀 수 없다고

저자 브랜의 브라운은

취약성과 수치심을 연구하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심리학자 입니다

그녀의 테드 강연  5400만 뷰를 기록하고 있죠

수치심은 참 고통스러운 감정 입니다

 

저자가 수치심 어떤 느낌 있냐고 물었을 때

참가자들은처참한 기분이 든다 

한없이 작아진다 말할 수 없이 어렵다

거부 당한 것 같다 난도질 당한 느낌이다 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못생겨서 뚱뚱해서 집이 가난해서 연봉이 적어서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대학이나 회사를 다니지 못해서

크고 작은 수치심을 느낍니다

 

남과 다르면 안 된다는 걸 강조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 애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기대를 만족시킬 순 없기에

우리는 부족한 자신을 탓하고 나는 문제 있는 사람이라 비난하며 괴로워합니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는 수치심이 외부에서 온다 고 말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몸매를 갈망한 게 아닙니다

태어날 때 부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말하는게 두려웠던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려 아무리 애를 써도

미디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잡지를 펼치면 표지에는 10일만에 7키로빼기라는 문과 함께

날씬한 여성이 호수를 취하고 있습니다

잡지 해서 엄마가 된 슈퍼 모델은 이렇게 말하죠

엄마라고 해서 자신의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에요

아이들도 엄마가 뚱뚱하고 못생긴 것 싫어하죠

 

수치심은 젠더의 따라 채계화 됩니다

여자면 일해야 한다 남자면 일에 한다는

사회의 시선과 문화가 수치심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미디어와 사회적 기대에 결과는 어떨까요

저자가 인터뷰한 여성 중 90% 가

외모와 몸무게에 대해 수치심을 느낀다 고 답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약 7배 만명의 소녀와 여성이 섭식 장애를 앓고 있죠

남성은 실패 하는거 약해 보이는 것에 큰 수치심을 느낍니다

남자다워 한다는 것에는 외모 체격 능력까지 포함 되 줘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는 안되고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남성 안 자신의 수치심을 어떻게든 숨기려 합니다

 

수치심을 견디지 못해 우리는 두 가지 탈출구를 찾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됐다

난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

반대로 아무 잘못 없는 남편 자녀에게 화풀이 되거나

친구에게 본 풀이를 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경우든 결국에는 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세상에 나 혼자 뿐인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자기 혐오와 남 탓에 빠지지 않고 수치 심해서 나오려면 어떻게 할까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공감해주는 친구에게 털어 놓는 것입니다

수치심으로 힘들었던 참여자는

친구의 이런 말에 위로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에 해 봐도 그런 적이 있어 크게 어떤 기분인지 나도 알아

너만 그런 거 아니야 괜찮아

더 정상이야 친구가 공감해 주는 순간 수치심은 다른 것으로 변합니다

 

뭔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벗어던질 수 있는 다른 것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거

내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우리들 안정감을 느끼고

좁은 시야에서 나오게 됩니다

여러분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여러분과 같은 이유로 수치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잘못 된거 여러분의 아니라

사회 시선 기대 이며

여러분에게 수치심을 주려고 했던 상대방 입니다

수치심 고난은 사회는

자신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것이 사회적인 시선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뒤 친구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아 보세요

말로 표현해야 고통의 사라집니다

만약 외모를 지적하는 엄마 혹은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이렇게 말해 주세요

살을 빼라고 엄마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마음에 너무 아프고 수치심을 느껴

엄마 관심이 있는건 내 외모 뿐 이라는 생각이 들정도 야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살을 빼게 할 생각이라면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아

기분만 상하고 엄마와의 사이만 나빠질뿐이야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난 정말 맘이 많이 아파

 

불가능한 기대를 맞추지 못해

자신을 비난 하고 있다면

문제는 자존감이 아니라 수치심 입니다

수치만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자 고통 스러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둘러보세요

여러분 곁에 있는 사람을 같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들을

그리고 먼저 다가가 주세요

수치심에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공감이라는 선물과 함께

 

 

 

 


출처 : https://www.youtube.com/@SWEETSANDTV

 

인간의 감정은 어떤 감정이든지 내면화될 수 있다.

내면화란 여러 감정 중 특정한 상황에서 감정의 기능이 멈춰서

아예 성격 스타일 자체로 굳어졌다는 뜻이다.

아마 당신 주변에도 투덜이

혹은 만날 인상 찌푸리고 돌아다니는 사람

혹은 슬픔에 젖어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그들은 어떤 특정한 감정이

이젠 그 사람의 정체성 즉, 성격의 핵심이 된 것을 보여준다.

이런 사람들이 화를 내거나 슬퍼할 때는

이미 그들이 화가 났다거나 슬퍼한다고 여길 수 없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화, 슬픔 자체이기 때문이다.

수치심이 내면화하는 과정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1.
수치심이 내재된 사람에게 양육을 받아
수치심을 학습하며 자신과 동일시하여
나중에는 그 사람과 마찬가지가 된 경우.
다시 말해, 부모님이 부정적인 성격으로 인해 양육을 받는 과정에서
수치심을 받았음에도 내가 똑같이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2.
어릴 적에 버림받고 학대받은 충격으로 인해
감정과 욕구, 동기가 수치심에 묶인 경우.

3.
수치심이 드는 기억들이 내면화되어
속에서 계속 악순환으로 작용하는 경우.

위의 세 가지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강화될수록

수치심은 더욱 내면의 단단히 자리 잡게 된다.

 

'동일시'란 모든 인간에게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사실 우리는 동일시가 필요하다.

자신보다 더 큰 누군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건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우리가 누구에게 소속해있을 때 보호와 안정감을 느낀다.

이 소속해있는 느낌을 가지려면

우리는 누군가와 동일시해야 하는데

이 소속하고 싶은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이는 자신이 속한 구성원이나 단체가 자신을 돌봐준다 는 믿음을 가지고

배우자나 가족 중에 자기를 돌봐주는 자,

자신이 속한 그룹, 문화, 나라 등에 의존하고 기대한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곳에 충성심을 보여주거나

자신이 속한 그룹에 가끔가다 광적으로 집착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들이

수치심에 내재된 부모와 함께 산다면

그 아이들은 부모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부모 밑에 있다는 것은 해로운 수치심을 갖게 되는

첫 단계라 볼 수 있다.

아이가 버림을 당했을 때 수치심은 내면화하게 된다.

버려짐. 다시 말해

유기란, 그 일을 당한 사람에게 자아와 정신적 힘이 말살되는 결과를 낳는다.

 

아이들은 그들을 돌봐주고 그들에게 반영해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살 수 없다.

그리고 아이가 하는 행동에 반영해주는 것은 아이가 태어난 첫 해에 중요한 사람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버려짐이란 반영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감정이 닫힌, 수치심이 내재된 부모는 아이의 감정에 반영해 줄 재간이 없다.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말을 할 수 없기에 감정의 교류를 통해 의사 소통이 이루어진다.

감정을 반영해주는 사람 없이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생각해보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려는데,

당신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무시를 한다면 얼마나 당황하고 화가 나겠는가를.

 

감정의 교류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먼저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소중한 사람이 우리를 보는 눈을 통해서 우리를 알아줘야 한다.

유기, 다시 말해 버려짐은 아이의 의존하려는 욕구가 무시,

모든 종류의 학대, 산만한 가족관계나 가족시스템에 필요에 의한 희생이라고 볼 수 있다.

기본적 욕구나 느낌이 수치심에 묶였다는 것은

이미 건강한 수치심이 해로운 수치심으로 변형되어 구실을 못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이는 당신이 무엇을 원할 때마다 그 욕구를 수치스러워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수치스럽다는 말은

당신의 존재 중심에서부터 수치를 느낀다는 말과 같다.

 

수치스러운 기억들은 다양한 이미지로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불행히도 우리 대부분이 그 수치스러운 감정들을 제대로 해소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기억들은 우리 안에 꽁꽁 숨겨져 억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언어로 수치를 당한 기억도 그 당시 상황에 따른 기억 만큼이나 생생하게 살아있다.

정말로 불행한 일이지만, 아이는 부모가 최악의 경우에 저지른 일을 더 잘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혼이나 별거는 아이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다.

나중에 이와는 전혀 다른 일이지만,

그 전에 일어났던 안좋은 상황과 조금이라도 비슷할 경우

그때 가졌던 감정이 살아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마치 눈덩이가 산비탈에서 내려오면서

점점 커져 나중에는 이것이 조그만 눈덩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만큼 커져 걷잡을 길 없이 불어난다.

말 한마디, 잠깐 있었던 일, 표정 하나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때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수치스러웠던 기억 속에 합쳐져 덩어리같이 머물러 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수치스러운 감정이 다시 속에서 재발되는데 굳이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질 필요도 없다.

이는 감정이 안에서 자발적으로 충동질하기 때문이며

새로운 일에 임하려는 우리를 얼어붙게 하거나

아예 '나 같은건 가능성도없어' 라고 주저앉게 만들며 자신의 실수에 역겨워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는 자신을 역겨워한다는 말과 같다.

수치심은 정말로 깊이 내면화되는 감정인 것이다 .

자신의 마음이 분열된 것과 같은 증세로 고생할 때는

지금 그 사람이 자신의 참된 자아와 분리되어 그런 감정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당신의 가정에서 (당신이) 화를 표현하는 것을 (부모님이)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화내는 감정과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화가 날 때마다 수치심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식으로 가정에서 교육한다 해도

도무지 화의 감정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사실 '분노'는 당신을 보호하는 감정이며 '분노'의 감정이 없으면 자신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 기분만 맞춰주려는 사람이 된다.

감정이 수치심으로 묶이게 되면 당신의 감정과 더욱 분리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치심이 당신 안에 완전히 자리 잡으면

당신 안에 있는 그 어느 것도 좋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 안의 모든 것은 다 쓰레기같이 여겨져 자신을 실패자로 느끼게 된다.

이제 당신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마치 무슨 물건이나 된 듯이 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자신을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대상으로 여기는 것 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감시의 대상인 것처럼

자신 내면을 비판적으로 보며 조각조각 찢어 놓는다.

그리고 그들 자신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다른 관계에서까지 파급된다.

이때 주로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편견과 미움이다.

남을 평가하고 조각조각 찢어 놓은 사람은 이미 자신을 조각으로 찢어 놓은 사람이다.

그리고 이런 다중인격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은

과거의 성폭력이나 육체적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다.

자신과 분리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적인 세계를 창출하여 사는 수밖에 없다.

자신과의 이질감은 종종 만성적인 우울증을 동반하는데

이 우울증은 자신과 분리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음이다.

자기 자신이 싫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위장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취지로 만들어진 모습들은 언제나 인간 이상이거나 그 이하이다.

이들은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거나

또는 망해가는 역기능 가정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영웅적 인물',

이도저도 아니면 '가족 내의 희생자'가 된다.

이런 모습은 주변에 흔하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일단 거짓 자기가 만들어지면

참자기의 모습은 숨겨진다는 것이다.

거짓된 자기 모습으로 수년이 흐르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거짓된 자기의 양상이 주로 '완벽주의'로 나타난다는 것은 흥미로운데

이는 자신의 영혼에 구멍이 난 것을 밖에서 보상하려는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밖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이는 데 성공했을 지 몰라도

내면에는 여전히 수치심으로 고통받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위장된 모습엔

항상 극과 극을 달린다는 면이다.

'어마어마하게 성취하는 모습'과 '어림도 없는 모습'

'아주 성자 같은 모습'과 이에 반한 '사악한 모습'

'권력으로 찍어내리려는 모습'과 '동정으로 밀어붙이려는 모습' 등

거짓된 위장은 항상 극과 극을 달린다.

상호의존의 사람은 '내면'의 삶은 없고 모든 것은 '외부'에서 이루려고 한다.

 

상호의존에 대하여 많은 분량의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모두가 동의하는 의견은

상호의존은 어릴적 '상실감'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이다.

상호의존의 사람은 '내면의 삶'은 없고

모든 것을 '외부에서 이루려고' 한다.

사랑도, 행복도.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느낌'조차 외부에 의존한다.

 

요즘으로 치면,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 블로그,

이런 데에 올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평가하는 나의 모습'을 '진짜 자기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참자신에 대한 자각 없이

모든 것을 외부에서 구하려는 시도는

자신과의 소외된 고통을 더 강화시켜주고

인간관계 가운데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다.

 

나는 이 설명만큼이나마

내면화된 수치심의 상태에 대해 잘 설명한 게 없으리라 보며

'상호의존'이야말로 '내면화된 수치심'의 정수라 볼 수 있다.

신경증적인 수치심은

모든 중독과 강박적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내 입장에서의 강박적 중독의 행동에 관한 정의는

순간의 만족을 얻기 위해 삶 전체를 희생시키는 정신적 행위이다.

사람들을 중독으로 몰아가는 중심에 깔린 생각은

자신이 열등하고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이 생각을 달래보고자 일과 쇼핑 또는 도박을 통해 몰두하여

잠시 잊으면서 '순간적인 만족'을 구하려 든다.

모두 정도에서 넘어서서 일 중독자는 일에서,

알콜 중독자는 술에서, 애정에 중독된 사람은 애정행각에서

각자 즉각적인 위안을 얻으려 든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면의 불만족을 보상받으려는 행위이며

이에 따른 결과는 오히려

그 전보다 더 비참해지며 수치심의 정도가 더 깊어질 뿐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런 중독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그래서 내가 만약 다이어트를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맛있는 것을 먹거나,

섹스를 하거나, 돈을 더 많이 벌거나,

일을 더 열심히 하면

속에서부터 울려오는 이 괴로운 소리,

즉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싫어하는 소리가 줄어들거라 여기기 시작한다.

(집착, 나쁜습관이나 중독이 여기서 시작하는 거구나,,,)

그리하여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로부터 비롯한

생각을 행동으로서 보상 하려 만들어

소위 행위 지향적인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가치는

외부에 이루어놓은 성취가 중요하지

내면에 무슨일이 벌어지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보여지는게 중요하고 내 내면의 마음은 무시하게 되는거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밖의 일에 열중하느라

안을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는게 맞는 말이다.

일단 어떤 행위로 일시적인 위안을 얻게 되면 중독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리고 결국 중독이 되어 집착의 수준까지 가게 되면

이제 이런 행동들을 통해 내면의 불만족을 표출한다.

예를 들어 알코올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몰래 뭘 먹든지 아니면 성행위에 집착하든지 하는 것이다.

가장 흔한 증상은 알콜중독, 마구 먹는 것(폭식), 자위행위, 돈이 있으면 있는대로 다 써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망가진 몸, 과체중, 의미 없는 섹스와 텅 빈 지갑 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수치심만 더 가중시킬 뿐이다.

더구나 수치심을 없애려고 밖으로 표출하는 행동은

인생을 송두리째 망치는 결과를 가져오기 쉽다.

 

 

편집장애 역시 내면에 있는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일어난다.

편집증을 가진 사람은 항상 초긴장 상태로

자신이 언젠가는 일어나리라고 염려하는 일

즉 자신이 무시되거나 배신하는 일 등이 일어날 것에 대해 항상 긴장하고 있다.

편집증을 가진 사람은 평범한 일도

자신을 위협하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기며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편집증의 결함이라면 그건 외부를 비난한다는 데 있다.

이들의 수치심에 기초한 눈은 자신이 부정하고 싶은 자신에 대한 경멸이나 불만족을 외부로 투사한다.

남이 하는 잘못이나 실수거리는 이들에게 용서가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밖으로 투사하여

남에게 전가시키며 가혹하게 구는 것이다.

육체적 학대자는 그 자신도 전에 피해자일 가능성이 많다.

아이들을 폭력이나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부모는 그 자신들도

어릴적에 부모로부터 그렇게 당한 사람들이다.

자신이 당한 상처를 가슴 속에 묻어둔 채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가

아이를 키우는 때에 전에 자신이 경험했던 비슷한 상황이 도래 하자

아이들에게 자신이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카우프만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때리는 부모들은 전에 자신이 부모에게 그와 같이 맞은 때가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때 해결하지 못한 마음을

부모 역할을 하면서 아이에게 표출하는 것이다.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고, 협박하고, 처벌을 내리고,

때리는 행위, 그리고 이제는 부모와 같은 가해자의 역할로서 말이다.

왜 그같이 괴로워했던 일을 부모가 되어서 자신의 아이에게 그대로 하려는 것일까?

이 답은 가공할만한 동일시에 있다.

 

아이들은 맞거나 감정적으로 상처를 당할 때

이를 가능한 빨리 밖으로 표출시키고 싶어한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으니

아이들은 차라리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힘과 권력을 가진 가해자와 자신이 동일한 존재라고 여기며

그 참혹한 순간을 버텨 나간다.

아이는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이 비참한 지경에 처한 아이인 동시에

또 막강한 힘을 가진 가해자로 보려 한다.

이들이 나중에 가해자의 역할을 하게 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이들 자신이나

아이들 그리고 배우자이다.

그리고 그들 안에 있는 과거에 겪은 상처로 인한 수치심은

이 부정적인 순환 주기를 강박적으로 계속 진행시키게 한다.

폭력의 희생자는 나중에 가해자가 되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이 반복되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소위 말하는 학습된 무기력자가 되고 만다.

예측 불가능한 폭력은 무작위로 이어지고 수동적이 되어

깊은 무기력에 더 이상 자신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선택할 여지가 없다고 믿어버린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학대를 받고 폭력을 당할수록

오히려 부당하게 학대받는 자신을 더욱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자신을 수치스러워하면 할수록

더욱 자기를 대접 받을 자격이 없는 못난 존재나 가치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리고 자신이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길수록

선택할 힘도 점점 사라져간다.

내면에 자리잡은 수치심은 자신을 지킬 자리마저도 파괴한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경계가 없으면 자신을 방어할 자리도 없다.

인간은 해로운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그 자신과 분리된다는 사실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폭력당한 아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는건 이런 원리인가보다,,,)

 

자신과 분리되었다는 것은

자신이 아닌, 뭔가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온전한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인간이 자기 안에 살지 못한다면

동물처럼 항상 주위를 경계하며

비인간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해로운 수치심으로 인해 인간 이상이 되려고 하거나

그 이하가 되려는 것들은 모두 비인간적인 행동이다.

그들은 자기를 가리려고 거짓된 모습을 꾸며놓고는

이제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성취한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온 일이라기보다는

남을 위해 이루어지는 공연(연극)에 가깝다.

 

그들의 관심은 그들의 존재가 아닌 겉으로 드러난 행위에 맞추어져 있다.

성경은 '천국이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로운 수치심에 묶인 사람들은

자신의 안이 열등하고 못났다고 여기는,

고로 자신이 아닌 겉에서 행복과 자신의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

그 결과는 영혼의 파멸이다.

해로운 수치심은 사람의 내면을 갉아먹는데

그 사람이 자신을 못나고 열등하고 결점 투성이라고

끊임없이 여기기 때문에 결국 그 사람은 무기력해지고 만다.

이것은 '어떻게 날 바꿀 수 있겠어?' 라며 계속 수치에 수치를 거듭하는 성질이 수치심이 가진 성격이라 볼 수 있다.

(무기력은 여기서 오는거구나,,,)

수치심을 없애려고 시작한 행동이 중독으로까지 번져서

결국에는 수치심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해로운 수치심을 세대 간에 이어진다.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계속 전수된다.

미로운 점은 수치심이 내재한 사람 역시

같은 부류의 사람과 만나 결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한 결혼을 통해

각자 자신이 자란 가정에 있었던 수치심을 그들이 만든 가정의 들고 오는 셈이다.

그들의 결혼은 이미 수치심이 중심에 자리 잡은 결혼이며

이런 사람들은 가족 간에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못나고 열등한 존재로 격하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데

이것은 자신이 노출될까봐 두려워서 어느 정도까지 가면 더 이상 허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깊이있는 인간관계가 어려운 사람들은 이 때문이구나,,,)

 

수치심이 내재된 부부들은 대화가 거의 없으며,

싸운다 해도 생산적으로 싸우지 못하고

서로를 상처주는 어리석은 싸움만 반복한다.

또한 서로를 조종하려 들고, 더 많은 힘을 가지려 하며,

부부간에 경쟁하며, 뒤로 물러서고 서로를 비난하면서 살아간다.

들은 그들만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사는데

이 합의란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뜻으로

이들은 합의 가운데 관계를 이어나간다.

만약 이런 가정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처음부터 출발이 안 좋은 것이다.

부모는 아이들의 모델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모델 역할에는 어떻게 남자와 여자 역할을 해야하는 건지

다른 사람과 관계는 어떻게 맺는건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 내는건지,

그리고 정당하게 싸우는 법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감정적, 정신적, 육체적 경계를 어떻게 세울 수 있는지,

그리고 살아가면서 만나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될지

스스로를 어떻게 다스려나가며 어떻게 남을 사랑할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수치심이 내재된 부모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들이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르쳐줄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분명히 알지만

이를 제대로 표현할 줄은 모른다.

그러므로 들어줘야 한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들어주는 일은

감정이 성숙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불만족스럽고 불안하다면 남의 이야기를 들어 줄 여력이 없다.

수치심이 내재된 사람은 특히 더 하다.

자기 자신이 체험을 받지 못한 부모들은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이런 부모 밑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때마다 수치를 당하는 데

이는 아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부모 역시 가지고 있지 못한 이유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게 되면 나중에 커서 외모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면은 그들이 필요할 때에 채움을 받지 못한 아이가 자리잡고 있어 늘 공허함을 느낀다.

더구나 아이의 필요가 채워지지 못해 후에 성인 구실로 못한다.

이 말의 뜻은 성인이라면 자신을 위해 일하면서 준비하는,

즉 자신이 스스로를 만족시킬 줄 아는 수준의 사람이라 볼 수 있지만

이들에게는 욕구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성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만족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는 초기부터

나는 항상 너무 많은 것을 바라거나, 처음부터 너무 깊숙이 진전했다.

여자를 만나면 얼마 되지도 않아 결혼 이야기부터 꺼냈다.

그리고 일단 그 여자가 날 사랑한다고 여겨지면

나를 엄마처럼 보살펴 줄 것을 기대했다.

마치 예전에 받지 못한 부모 사랑을 대신 채울 것 처럼 말이다.

수치심이 내재된 사람들은 수치심이 내재된 가정을 만든다.

아이는 자라면서 사랑 대신 수치심의 토양에서 자라게 된다.

수치심이 내재된 가정은 사회적 시스템의 규칙으로 운영된다.

그러면 개개인은 자신들의 참모습을 죽이면서

가족을 움직이는 시스템의 요구에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가정 가운데서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학교나 교회에 간다 해도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수치심을 치유하는 게 아니고 그 위에 옷만 덧입힐 뿐이다.

즉, 이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시스템은

이들의 수치심이 더 깊게 자라도록 환경만 제공해줄 뿐이다.

 

 

 

 

출처 : https://www.youtube.com/@drawth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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